다케다 가쓰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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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다 가쓰요리는 다케다 신겐의 넷째 아들로, 1573년 아버지의 사망 후 다케다 가문의 20대 당주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패배, 호조 가문과의 동맹 파기 등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1582년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공격으로 덴모쿠 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아들 노부카쓰, 정실 호조 부인과 함께 자결하며 다케다 가문은 멸망했다. 그의 통치와 관련하여, 중앙 집권화 시도, 측근 중용 등이 가문의 내분을 심화시켰다는 평가가 있으며,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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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가쓰요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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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다케다 가쓰요리 |
로마자 표기 | Takeda Katsuyori |
한자 표기 | 武田 勝頼 |
다른 이름 | 스와 가쓰요리, 이나 가쓰요리, 통칭: 시로 |
출생 | 1546년 |
사망 | 1582년 4월 3일 |
사망 장소 | 가이국 덴모쿠산 |
묘소 | 호센지, 게이토쿠인, 묘신지 다마호인, 고야산 오쿠노인 |
계명 | 게이토쿠인덴 라이잔쇼코 다이코지 |
가문 | 신 씨, 스와 씨 → 겐 씨, 다케다 씨 |
관위 | 다이젠다이부(자칭 또는 칭칭), 사쿄다이부 |
봉행 | 무로마치 막부 시나노 슈고 |
가계 | |
아버지 | 다케다 신겐 |
어머니 | 스와고료닌 |
형제 | 다케다 요시노부, 우미노 노부치카, 노부유키, 니시나 모리노부, 구즈야마 노부사다, 노부키요, 고바이인, 기쿠히메 |
배우자 | 류쇼인(도야마 나오카도의 딸, 오다 노부나가 양녀), 호조 부인(호조 우지야스의 여섯째 딸) |
자녀 | 다케다 노부카쓰, 아들 (슈테츠다이도지), 다케다 가쓰치카, 사다히메, 기타 |
직위 | |
직위 | 다이묘 |
소속 | 스와 씨, 다케다 씨 |
지휘 | 신푸 성 |
군사 활동 | |
전투 | 간바라 공방전 후타마타 성 공방전 미카타가하라 전투 다카텐진 공방전 요시다 성 공방전 나가시노 전투 오모스 전투 덴모쿠잔 전투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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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546년 신겐과 스와 요리시게의 딸(시호: ) 사이에서 태어났다.[1] 가쓰요리는 처음에는 로 알려졌으며, 어머니의 스와 씨족을 계승하여 다카토 성을 영지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의 형 다케다 요시노부가 죽은 후, 가쓰요리의 아들 노부카쓰가 다케다 씨족의 상속자가 되면서 가쓰요리는 사실상 다케다 씨족의 지배자가 되었다.[3] 1581년 니라사키에 새로운 대규모 성인 신푸 성을 쌓고 거처를 그곳으로 옮겼다.
1573년 신겐의 죽음 이후 가쓰요리는 다케다 가문의 지휘를 맡아 도쿠가와 씨(德川氏)와 싸웠다. 1574년 아버지 신겐조차 성공하지 못했던 다카텐진 성을 함락시켰다( 다카텐진 공성전(1574년) 참조). 이로써 그는 다케다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3,000정의 총에 의한 최초로 기록된 집중사격(Volley fire (infantry tactic))에 패배하여 많은 병력과 다케다 가문의 여러 장군 및 가신들을 잃었다.[6]
1578년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를 우에스기 가게토라(上杉景虎)에 대항하여 돕는 과정에서 후조 우지야스(北条氏康)의 양자이자 상속자인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일곱 번째 아들인 가게토라를 도운 것으로 인해 후호조 씨(後北条氏)의 분노를 샀다. 이는 1580년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에 대항한 오모스 전투(Battle of Omosu)를 초래했다.
158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 의해 다카텐진 요새를 잃었다(다카텐진 공성전(1581년) 참조). 이 공성전은 오카베 모토노부(岡部元信)의 수비대 680명의 사망으로 끝났다.[7] 1582년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에 의해 다카토 성을 잃었다(다카토 공성전(1582년) 참조). 신슈(Shinano province) 지역에 있는 유일한 다케다의 거점이었던 이 성은 노부나가의 다케다 영지 최종 침공에 저항했으며, 1582년 3월 2일에 함락되었다.[8]
기소, 아나야마 등 많은 씨족들이 다케다 가문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가이 국으로 진격하여 신푸 성을 포위 공격했고, 가쓰요리는 남은 300~400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킬 수 없어 신푸 성에 불을 지르고 덴모쿠 산으로 도망쳤다. 이후 그의 군대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 의해 덴모쿠잔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가쓰요리와 그의 아내, 아들은 할복했다.[3][5] 이것으로 다케다 씨족은 멸망했다.
니케이(利慶)라는 여승이 그의 아내의 자살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몇몇 시를 지어 그들의 명예를 기렸다.[9]
- 아버지: 다케다 신겐(武田信玄)(하루노부(晴信))
- 어머니: 스와 고료닌(諏訪御料人)(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의 딸)
- 정실: 류쇼인(龍勝院) (토오야마 나오야스(遠山直廉)의 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양녀)
- * 다케다 노부카쓰(武田信勝)
- 계실(継室): 게이린인(桂林院)(호조 부인(北条夫人))(호죠 우지야스(北条氏康)의 딸)
- * 정히메(貞姫): 미야하라 요시히사(宮原義久)의 부인
- * 무세이인사이리슈우테쓰다이도우시(武性院斎理周哲大童子)
- * 다케다 가츠치카(武田勝親)(다케다 가쓰조(武田勝三))
- * 혼코 신케이안슈(本光信継庵主) (1582년 - 1655년) 『고야산 인도인 과거장(高野山引導院過去帳)』에 기록. 어머니는 다카하타씨(高畑氏).
- * 하야시바 다이시(林葉大姉)
- * 다케다 지로(武田次郎)의 정실
- * 정광다이시(貞光大姉)
장남인 다케다 노부카쓰(武田信勝)가 있었으나, 덴쇼(天正) 10년(1582년)에 가쓰요리와 함께 사망했다. 차남은 요절했다. 삼남, 사남은 출가했다고 전해진다.
딸 중 한 명인 정히메는 코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의 딸인 카구히메, 니나카 모리노부(仁科盛信)의 딸 등과 함께 신겐의 딸인 마쓰히메(松姫)에게 이끌려 무사시 국(하치오지(八王子))])로 피신했다. 이후, 마쓰히메와 유신들에 의해 양육되었고, 후에
2. 1. 신겐의 적자로
1546년 다케다 신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 아버지 신겐은 1562년 가쓰요리가 멸문시킨 스와 가문의 가독을 잇도록 하기 위해 어머니의 성인 스와씨로 개명하게 한다. 가쓰요리의 '요리(賴)'는 스와 가문의 당주였던 외조부 스와 요리시게의 이름 한 자를 쓴 것이다. 그래서 스와 시로 가쓰요리라고 이름을 올려 시나노 다카토 성의 성주가 되었다.[1]1565년 이복형인 다케다 요시노부가 스루가 침공을 둘러싸고 신겐과 대립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유폐되어, 1567년에 죽는다. 둘째 형인 운노 노부치카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기 때문에 출가했고, 셋째 형인 노부유키는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가쓰요리가 신겐의 지명으로 후계자가 되었다.
덴문 15년(1546년) 다케다 하루노부(신겐)의 넷째 아들(서자)로 태어났다.[1] 어머니는 다케다 신코 후기부터 하루노부 초기까지 동맹 관계였던 신슈 스와 영주 스와 요리시게의 딸인 스와 고료닌이다.[1]
다케다 씨는 가쓰요리의 할아버지인 신코 시대에 스와 씨와 동맹 관계였지만, 아버지 하루노부는 덴문 10년(1541년) 6월 신코를 몰아내고 가독을 계승하면서 스와 씨와 결별하고, 덴문 11년(1542년) 6월에는 스와 침공을 감행하여 스와 요리시게, 스와 요리타카 등 스와 일족은 멸망했다.[12] 하루노부는 스와 잔당 타카토 요리쓰구 등의 반란에 대해 요리시게의 유자녀인 치요노미야마루(토라오마루)를 옹립하여 스와 유신을 통합하고 요리쓰구를 제압했다.
하루노부는 측실로 스와 고료닌을 다케다 씨의 거성인 고후의 적죽가사키관으로 맞이하여 덴문 15년에 가쓰요리가 태어났다.[13] 요리시게 유자녀인 치요노미야마루는 스와 惣領家(소료케)를 계승하지 못하고 폐적되었으며, 같은 해 8월 28일에는 치요노미야마루를 옹립했던 스와 마쓰타카가 할복 명령을 받았다.[14] 반란을 모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15]
다케다 신겐은 신슈(信濃) 공략을 본격화하여 에치고(越後) 국의 우에스기 씨와 대결하였고, 에이로쿠 4년(1561년)의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신슈 평정이 일단락되었다. 신겐은 신슈 지배에 있어서 구족(舊族)에 자녀를 후계자로 삼아 회유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가쓰요리의 이복동생인 니시나 모리노부는 신슈 니시나 씨를 계승하였다. 가쓰요리는 같은 해 6월에 스와 가문의 명적을 계승하여, 스와 씨의 通字인 "요리(頼)"를 이름에 사용하여 '''스와 시로 가쓰요리(諏訪四郎勝頼)'''가 되었다. 가쓰요리는 아토베 시게마사 등 8명의 가신단을 받았으며, 사촌인 다케다 노부토요 등과 함께 친족 중에 속하였다.[18]
가쓰요리는 성대(城代) 아키야마 도라시게를 대신하여 신슈 다카토 성주가 되었고, 가쓰요리의 다카토 성 입성에 있어서는 바바 노부하루가 성의 개수를 담당하였다.[18]
에이로쿠 6년(1563년) 우에노 미노와 성 공격에서 첫 출전을 하였다. 나가노 씨의 가신인 후지이 부고가 정찰에서 돌아오는 곳을 추격하여 성 밖 츠바키야마에서 격투를 벌여 토벌하였다.[19]
에이로쿠 8년(1565년)에 이복형이자 다케다 씨의 후계자였던 다케다 요시노부의 가신들이 신겐 암살 음모로 처형되었고, 요시노부 자신도 유폐되었다.[18][21]
같은 해 11월, 가쓰요리와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 양녀(류쇼인)와의 혼례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 무렵의 신겐은 종래의 북진 전략을 변경하여 오다 씨와 동맹을 맺고 신슈 침공과 도카이 지방으로의 침공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차남인 류호는 유년기에 천연두에 걸린 것이 원인으로 실명하여 출가하였고,[22] 삼남인 노부유키는 요절하였기 때문에, 가쓰요리가 신겐의 지명으로 후계자로 정해졌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다케다 가문 내에서는 가쓰요리가 아닌 이복동생인 니시나 모리노부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에이로쿠 10년(1567년), 다카토 성에서 정실·류쇼인과의 사이에 적남 무왕마루(다케다 노부카쓰)가 탄생한다.
겐키 2년(1571년) 2월, 가쓰요리는 고후로 소환되고, 삼촌인 다케다 노부카도가 다카토 성주가 된다. 같은 해 9월 16일, 정실·류쇼인이 사망한다.[23]
요시노부 사건이 밝혀지면서 이토미 도라마사 등 많은 가신들이 처벌받았기 때문에, 유폐된 요시노부는 폐적되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산조 부인이 낳은 아들이 사실상 요시노부뿐이었던 점(실명하여 출가한 류호는 당주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영화원과 혼인한 요시노부를 폐적하는 것은 이마가와 씨와의 혼인 동맹 붕괴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신겐은 판단을 주저하는 사이에 요시노부가 병사하고 만다. 요시노부의 죽음으로 산조 부인 이외의 처첩이 낳은 자식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중 장남이었던 스와 고료인이 낳은 가쓰요리는 이미 스와 씨를 계승하고 있었고, 더욱이 노부나가의 양녀와의 혼담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마가와 씨와의 재혼을 위한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한편, 유카와 부인이 낳은 니시나 모리노부는 그동안 『甲陽軍鑑』에 에이로쿠 4년(1561년)에 니시나 씨를 계승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이후 고문서 연구를 통해 실제로는 에이로쿠 12년(1569년) 이후로 여겨지게 되었다. 모리노부의 첫 번째 정실은 신겐의 이복동생인 다케다 노부시게의 딸이었고, 다케다 씨 일문이나 가중에는 당시 미혼의 자식 중 장남이었던 모리노부에게 다케다 씨 적류의 딸을 시집보내 요시노부를 대신하는 후계자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요시노부를 대신할 이마가와 씨와의 정략결혼 대상을 찾지 못한 채 이마가와 씨와의 동맹 파기 및 개전에 이르렀고, 신겐은 어린 모리노부보다 경험이 풍부한 가쓰요리의 후계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쓰요리를 신겐의 후계자로 하여 관위 수여와 편휘를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신청한 것은 겐키 원년(1570년) 4월이었으나, 이유는 불명이나 신청은 기각된다. 그러나 같은 해 7월에 산조 부인이 사망하여 정실의 의향을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 신겐은 가중의 설득에 나서, 최종적으로 가쓰요리를 다케다 씨의 후계자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요시노부의 죽음으로부터 4년이 지난 겐키 2년(1571년)에 들어서부터로 추측되며, 모리노부는 당주가 없던 니시나 씨에 들어가게 되었다.[35]
2. 2. 가독 상속
1573년 4월, 신겐이 서상 작전 도중 병사하자, 가독을 상속하여 다케다 가문 제20대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신겐의 죽음으로 인해 상경작전은 좌절되었고, 가쓰요리는 본거지인 가이로 철수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신겐의 죽음을 숨기고 은거했다고 하였으며, 가쓰요리가 가독을 상속했다고 발표되었다.[35]에이로쿠 8년(1565년)에 이복형이자 다케다 씨의 후계자였던 다케다 요시노부의 가신들이 신겐 암살 음모로 처형되었고, 요시노부 자신도 유폐되었다.[18] 같은 해 11월, 가쓰요리와 오다 노부나가의 양녀(류쇼인)와의 혼례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 무렵의 신겐은 종래의 북진 전략을 변경하여 오다 씨와 동맹을 맺고 신슈 침공과 도카이 지방으로의 침공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가신단 내부에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요시노부파와의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차남인 류호는 유년기에 천연두에 걸린 것이 원인으로 실명하여 출가하였고,[22] 삼남인 노부유키는 요절하였기 때문에, 가쓰요리가 신겐의 지명으로 후계자로 정해졌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다케다 가문 내에서는 가쓰요리가 아닌 이복동생인 모리노부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35]
겐키 2년(1571년) 2월, 가쓰요리는 고후로 소환되고, 삼촌인 다케다 노부나리가 다카토성주가 되었다.
2. 3. 오다, 도쿠가와의 반격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신겐이 죽자 궁지에서 벗어났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가와치로 추방하고 에치젠과 오미를 공격해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멸문했다. 이에야스도 다케다씨와 친교했던 미카와 영주 오쿠다이라 사다요시,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를 자기 편으로 만드는 등, 신겐이 살아있을 때는 다케다군을 수비하기에 급급하던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의 역공이 시작되었다.이에 대해 다케다 가쓰요리는 아버지 이상의 세력 확대를 목표로 적극적인 정복 사업을 실시했다. 1574년 음력 2월 히가시 미노의 오다령을 침공해 아케치 성을 접수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와 함께 아케치 성의 원군으로 출진했지만, 그에 앞서 가쓰요리가 아케치 성을 함락시켰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기후로 철수했다.
1574년 6월 도토미의 도쿠가와령을 침입하고, 신겐이 함락하지 못했던 도토미의 철옹성인 다카텐진 성을 함락하고, 성주 오가사와라 나가타다를 굴복시켜 히가시 도토미를 대부분 평정했다.
1569년 가쓰요리는 간바라 전투(Siege of Kanbara)에서 호조 우지노부(北条氏信)를 패퇴시켰다.[4]
1572년 가쓰요리는 후타마타 전투(Siege of Futamata)에서 도쿠가와 씨(德川氏)의 영지를 성공적으로 점령했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의 미카타가하라 전투(Battle of Mikatagahara)에 참전했다.[5]
1573년 신겐의 죽음 이후 가쓰요리는 다케다 가문의 지휘를 맡아 도쿠가와 씨(德川氏)와 싸웠다.
1574년 그는 아버지 신겐조차 성공하지 못했던 다카텐진 성(Takatenjin castle)을 함락시켰다(다카텐진 공성전(1574년)(Siege of Takatenjin (1574)) 참조). 이로써 그는 다케다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1575년 그는 나가시노 전투(Battle of Nagashino)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3,000정의 총에 의한 최초로 기록된 집중 사격(Volley fire (infantry tactic))에 패배하여 많은 병력과 다케다 가문의 여러 장군 및 가신들을 잃었다.[6]
1578년 가쓰요리는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를 우에스기 가게토라(上杉景虎)에 대항하여 돕는 과정에서 후조 우지야스(北条氏康)의 양자이자 상속자인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일곱 번째 아들인 가게토라를 도운 것으로 인해 후호조 씨(後北条氏)의 분노를 샀다. 이는 1580년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에 대항한 오모스 전투(Battle of Omosu)를 초래했다.
1581년 가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 의해 다카텐진 요새(Takatenjin fortress)를 잃었다(다카텐진 공성전(1581년)(Siege of Takatenjin (1581)) 참조). 이 공성전은 오카베 모토노부(岡部元信)의 수비대 680명의 사망으로 끝났다.[7]
1582년 가쓰요리는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에 의해 다카토 성(Takatō castle)을 잃었다(다카토 공성전(1582년)(Siege of Takatō (1582)) 참조). 신슈(Shinano province) 지역에 있는 유일한 다케다의 거점이었던 이 성은 노부나가의 다케다 영지 최종 침공에 저항했으며, 1582년 3월 2일에 함락되었다.[8]
2. 4. 나가시노 전투
중앙 오른쪽의 「大」깃발의 장수가 가쓰요리.]]1575년 가쓰요리는 전년에 다케다 가문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하가 된 오쿠다이라 부자를 토벌하기 위해 1만 5천(일설에는 8천에서 1만)의 병사를 이끌고 미카와로 침입,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농성하고 있는 나가시노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오쿠다이라 군의 선전으로 공략은 시간을 끌게 되었고,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약 3만 8천(일설에는 오다군 1만 2천, 도쿠가와군 4천)이 나가시노(시타라가하라)에 도착하여 말 방책을 포함한 진성을 구축했다. 이에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한 2천의 병력은 남겨두고, 주력 1만 2천(일설에는 6천)을 이끌고 시타라가하라로 출격,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 대치한다.[45]
당시 고슈(甲州)의 병사는 강력했고, 나가시노 결전 전날의 소규모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다케다 군의 사기는 높았다. 그러나 신겐 이래의 중신들은 야전이 아닌 공성전에 가까운 상황을 감지하고 철수를 진언했다고 한다.[18] 그럼에도 가쓰요리는 오다·도쿠가와와의 결전을 선택, 1575년 음력 5월 21일 이른 아침 개전했다.
이날 오전 6시경부터 오후 2시경까지 전투가 계속되었고, 쓰치야 마사쓰구가 전사하는 등 수적으로 열세인 다케다 군은 연합군 방어선의 희생양이 되었다. 공격의 기세를 잃은 다케다 군은 붕괴, 패주 중에 바바 노부하루,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하라 마사타네, 사나다 노부쓰나, 마사테루 형제 등이 전사했다. 또, 도비노스토리데(鳶ヶ巣砦) 공방전에서 다케다 노부자네, 사에구사 모리토모가, 그 후 나가시노 성 부근 전투에서 고사카 마사즈미가 전사했다. 이 패배로 다케다 군은 1만 명 이상의 사상자(일설에는 다케다 측 1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600명)를 냈다고 전해진다.
2. 5. 오타테의 난
1578년 우에스기 겐신이 병사하자, 겐신의 두 양자인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우에스기 가게토라 사이에 오타테의 난이 일어났다. 오타테의 난 발발 초기에는 동맹자인 호조 우지마사의 동생인 우에스기 가게토라(호조 우지히데)를 지지하는 목적으로 군사행동을 했지만, 이후 우에스기 가게카쓰로 지지를 바꾸었다. 그 이유는 가게토라와 동맹을 하려면 기타 시나노 일대 및 고즈케 누마타성 일대의 양도를 요구하는 데 반해, 가게카쓰는 군자금에 궁핍한 다케다가에 2만 량에 이르는 황금을 지급하고 고즈케 누마타 성을 양도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토 양도를 요구하는 가게토라 지원을 찬동하는 가신은 없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로 지지를 바꾸게 된 이유였지만, 다케다 가신 스스로가 당장의 이익을 좇아 다케다가 멸망의 원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가게토라가 우에스기 가문을 계승한 경우에도 다케다령은 호조 세력에 의해 남북으로 협공되는 위험성이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6]다케다가와 화친하고 에치고로 간 결과, 가게카쓰가 승리하고 가게토라는 자결한다. 이런 우에스기가의 내분으로 가쓰요리는 호조씨와의 요청을 번복했기 때문에 동맹자 호조 우지마사까지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서쪽으로는 오다 노부나가, 남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으로는 우지마사라는 3대 세력에 둘러싸인 사태를 만든 것이다.
오다, 도쿠가와에 더해 호조까지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호조 우지마사의 행동은 소극적이었고, 동맹자로서의 신뢰를 잃었다는 가쓰요리를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또 가게카쓰와의 강화를 즈음해 아토베 가쓰스케, 나가사카 고켄이 두 사람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지만, 가게카쓰의 교섭은 시나노 방면의 책임자 다케다 노부토요가 했다는 속설이 있고, 가능성도 높다.
2. 6. 다케다 가문의 멸망
덴쇼 10년(1582년) 2월, 기소 요시마사(木曾義昌)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아나야마 바이세쓰가 오다·도쿠가와 씨에게 내응을 약속했다. 가쓰요리는 기소의 반역에 대해 인질을 처형하고 다케다 노부토요를 대장으로 하는 1만 명의 토벌군을 보냈으나, 눈 때문에 진군이 어려웠고 요시마사가 변명하며 충성을 약속하여 진군을 중지했다. 그 사이 오다 노부타다가 이나 방면에서, 가나모리 나가치카가 히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루가에서, 호조 우지나오가 간토와 이즈에서 다케다 영토로 침공을 시작했다(코슈 정벌(甲州征伐)).[26]이에 대해 다케다군은 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시모죠 노부우지(下条信氏) 부자는 가로(家老)인 시모죠 구베에(下条九兵衛)의 배반으로 미카와로 도망쳤다. 가와지리 히데타카의 군대가 이나구의 타키노자와 성(滝ノ沢城)을 점령했고, 모리 나가요시가 이끄는 선봉군이 도리이 고개를 경유하여 하이나(下伊那)로 침공했다. 오가사와라 노부미네는 봉화를 피워 오다군의 침공을 도왔고, 호시카 마사나오는 타카토 성(高遠城)으로 도망쳤다. 가쓰요리의 삼촌인 노부야스(信廉)는 오시마 성(大島城)을 버리고 가이로 패주했고, 이나 전선은 붕괴되었다. 가쓰요리는 이마후쿠 치쿠젠노카미(今福筑前守)를 대장으로 하는 기소 토벌군에게 도리이 고개 탈취를 명령했지만, 기소군에게 농락당해 패주했다. 순엔(駿遠) 방면에서는 이에야스가 코야마 성(小山城)을 탈환하고, 다나카 성(田中城)을 우회하여 순푸(駿府)에 들어갔다. 아사히나 노부오키를 패주시키고 다나카 성의 이다 노부후사(依田信蕃)의 저항을 꺾고, 내응을 약속했던 아나야마 노부키미의 환영을 받았다.
이 정보를 접한 다케다군의 장병은 불신을 일으켰고, 틈만 나면 도망쳤다. 유일하게 저항한 것은 동생인 니이나 모리노부(仁科盛信)가 농성한 타카토 성(高遠城)뿐이었다.
같은 해 3월, 가쓰요리는 미완성의 신부 성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오야마다 노부시게와 사나다 마사유키가 가쓰요리를 받아들이겠다고 표명했지만, 가쓰요리는 노부시게의 거성 이와도노야마 성을 선택했다. 그러나 노부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투항하는 방침으로 전환했고, 가쓰요리의 진로를 막았다.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추격해 와서, 도망갈 장소가 없다고 각오한 가쓰요리 일행은 덴모쿠산으로 향했다.[3][5]
3월 11일, 그 도중 타노에서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추격대에게 포착되어, 가쓰요리는 적자인 다케다 노부카쓰와 정실인 호조 부인과 함께 자결했다. 향년 37세. 이로써 가이 다케다 씨는 사실상 멸문되었다.


2. 7. 말년
1582년 덴모쿠잔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게 패배한 다케다 가쓰요리는 아들 노부카쓰, 부인 호조 부인과 함께 자결하였다.[3][5] 이로써 다케다 씨족은 멸망했다.가쓰요리가 궁지에 몰렸을 때, 후계자인 다케다 노부카쓰가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못했기에, 서둘러 작은 벚꽃 가죽 갑옷(국보. 다케다 씨 대대로의 가독의 증표로 소중히 보관되어 왔다)을 입히고 함께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88년에 다케다 가쓰요리가 죽은 장소에 게토쿠인(慶德院)을 건립하여 다케다 가문에 조의를 표했다. 이곳에는 다케다 가쓰요리 가족의 묘비와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그 주위에는 가쓰요리 부자의 수급을 씻은 장소도 있다. 건너편 개천에는 가쓰요리를 모셨던 16명의 사무라이 여성이 몸을 던진 히메게자와와 그것을 애도하는 석비도 있다. 현재 매년 4월에 이곳 야마토무라(현 야마나시현 고슈시)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공(公) 마쓰리가 열리며, 이때 행해지는 무녀들의 춤은 16명의 사무라이 여성을 나타내고 있다.
에도 시대 이후 재흥하는 다케다 가는 가쓰요리의 형으로 맹인이었기에 출가했던 차남 우미노 노부치카(류호)의 계보이다.
3. 내정
가독 상속 후, 아버지 신겐 시대의 영주 및 가신들이 이권 추구를 하면서 내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신겐이 서상작전을 위해 많은 쇼야쿠멘쇼(諸役免狀)를 발행했기 때문에[40], 지지 기반이 취약했던 가쓰요리는 이미 그들의 기득권에 간섭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다 가문과의 대항을 위해 군제 개혁이 필요했기에 중앙집권화를 단행하였다. 요리오야요리코(寄親寄子) 제도[41]의 요리코를 받아들여 그들(영주들) 자식을 다케다 가문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이는 영주들의 기득권을 직접 위협하는 행위였기에 강한 반발을 샀다. 영주들에게 자식은 지지 기반이자 정치력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다케다 가문이 영내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중앙집권화를 단행했지만, 가쓰요리와 영주들 간의 골만 깊어져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우에스기 가문의 예를 보면(모반, 숙청, 추방이 빈번하게 발생), 중앙집권화 단행이 반드시 내부 대립을 야기함을 알 수 있어, 모든 것을 가쓰요리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도슈의 지지 기반, 권력, 영주들의 세력 강약, 중앙집권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 등의 요소로 볼 때, 어려운 시기에 중앙집권화를 꾀해야 했던 가쓰요리는 불운했다고 하겠다.
나가시노 전투 후, 도카이도(東海道) 방면으로 거듭 출병하면서 다케다 가문의 경제는 궁핍해졌다. (신겐 만년에 이미 궁핍했다는 설도 있다.) 이에 가쓰요리는 유력한 호상(豪商)을 미곡창고 관리직으로 두는 등 재정 안정을 꾀했다. 고요군칸에서는 이를 강한 어조로 비난하지만, 에도 시대 여러 번에서 재정 안정에 관한 호상의 역할을 보면, 고요군칸의 비난이 논점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금광에 관해서도, 다케다 가문은 직접 관리하지 않고 채굴업자들에게 소유권 명목으로 보상받았다.
이처럼 가쓰요리는 군정(군사정권에 따른 내정)에 심혈을 기울여 군제 개혁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단, 복잡하게 얽힌 파벌 속에서 지지 기반마저 약했던 상황에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4. 파벌
가이 영주들부터 신겐이 키운 부장, 그리고 친지들과 가쓰요리의 측근 등으로 다케다 가문의 가신 중심이 이동하면서, 체제의 변동을 잘 꾸려가지 못한 다케다 가문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38] 이러한 이유로 다케다 가문은 도슈와 가신단(다케다 군단)이 우수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센고쿠 다이묘라고 언급할 수 있다.
신겐의 치세는 카리스마로 표현되는 체제가 아니라, 지배하의 각 세력의 권력을 보장하고 각자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겐의 탁월한 능력의 반증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중앙집권화가 불가능한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겐 시대와 가쓰요리 시대에는 주위의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적대 세력이 많아졌고, 다케다 가문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국력을 가진 세력들이 대거 등장하였고 그 중에서도 오다 가문은 특출하게 큰 세력이 되었다. 오다 가문과 항쟁하면서 신겐이 남긴 중앙집권화라는 성가신 일을 가쓰요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설에 가쓰요리는 다케다 가문의 정식 도슈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독 상속(요시노부: 신겐의 장남)에 대한 후견인의 입장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소위 가쓰요리 진다이(陣代)[39]설이 있지만, 일차 자료로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속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스와 가문을 계승한 가쓰요리를 (그 전부터 있던) 동년배와 가신들이 깔보는 경향도 있던 것 같다.
다케다 가문 자체가 가이의 절대 군주가 아니라, 자국 내 영주들의 맹주로서 불안정한 기반에 서 있었다. 가쓰요리의 아버지 신겐도 영주들의 지지를 모아 아버지 노부토라를 추방하고 나서 가독을 승계했다. 가쓰요리의 큰 형 요시노부는 영주들의 지지를 모으지 못해 폐적되어 자결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신겐이 시나노를 지배하에 둘 때에도 시나노국 영주들을 적극적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다케다 가문과 이익을 공유한 이익집단 같은 체제를 띠게 되었다. 다케다 가문의 위세가 좋을 때는 견고하게 결속되지만, 일단 틈이 보이기 시작하면 공유하는 이익이 없어지게 되고 살얼음판을 건너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다케다 가문의 신겐 시대와 가쓰요리 시대의 파벌은 다음과 같다.
파벌 종류 | 주요 인물 | 설명 |
---|---|---|
자국내 영주들 | 이타가키 노부카타, 아마리 도라야스, 오부 도라마사 등 | 하루노부(신겐)를 옹립해 쿠데타를 일으킨 그룹 |
신겐이 키운 사무라이다이쇼 (류슈인쇼샤(龍朱印秦者)[42]) | 야마가타 마사카게, 하라 마사타네, 쓰치야 마사쓰구, 아토베 가쓰스케 | |
신겐이 키운 사무라이다이쇼 (중요 거점 성주) | 바바 하루노부, 가스가 도라쓰나, 나이토 마사히데, 아키야마 노부토모 | |
가쓰요리가 키운 사무라이다이쇼 | 아키야마 기이, 아베 쇼호, 오하라 단고 등 | |
친지들 | 아나야마 노부키미, 다케다 노부토요, 다케다 노부카도, 이치조 노부타쓰 등 | |
영주들 | 나가사카 고켄, 이마후쿠 조칸사이, 고마이 치카마사 등 | |
행정집행관 | 아토베 가쓰타다, 아토베 마사타다, 이치가와 마사후사 등 | |
외지인들 | 오바타 토라모리, 하라 도라타네, 다다 미쓰요리, 오코타 다카토시, 야마모토 간스케 등 | 다케다 5명신: 타국으로부터 초빙된 자로, 아시가루(졸병)를 지휘 등 |
거래나 교섭을 하는 상대자들 |
권력의 변천은 신겐 초기 1. -> 신겐 중기 ~ 후기 2, (+3) -> 가쓰요리 나가시노 전투 전 2+4+5+6 -> 가쓰요리 나가시노 전투 후 2의 자제 +4+5+6으로 된다. 특히 신겐 후기부터 가쓰요리 시대에는 류슈인조(龍朱印狀: 다케다가에 의한 행정문서)의 발행자로서 이 숫자에 따라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사나다 가문 등 미노와 성 조다이(城代)[43]로 되는 등 1.의 조종을 받고 있는 사람과 신겐이 키운 다이쇼로 있으면서 가쓰요리에게 가까웠던 아도베 가쓰스케 등은 특별한 예도 있다.
복잡한 파벌이 존재하는 다케다 가문에서, 나가시노 전투 이전에 지지기반이 약한 가쓰요리가 독단으로 다케다 가문을 지휘(나가시노 전투의 개전등)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문이 있다.
소위 슈쿠로라고 불리는 부장도 친지, 자국내 영주, 신겐의 하타모토(旗本)[44] 출신자 등 제각각이었다. 신겐이 키운 무장으로 있어도, 조직의 중추로 있는 사람과 최전선의 책임자로서의 입장과는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가쓰요리가 가신들과 대립했다고 도식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파벌이 많은 다케다 가문 안에서, 무장을 키우는 시간도 없이 강력한 적(노부나가)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됐던 상황은 불운이라 하겠다. 그 결과 많은 내분과 대립을 남긴 채 전장으로 향했던 것이다.
5. 평가
다케다 가쓰요리는 도쿠가와, 호조와의 전투에서 뛰어난 전술과 용맹을 보여주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신겐이 함락하지 못한 다카텐진 성을 공략하여 명성을 떨쳤으나, 이로 인해 자만심이 커졌다는 평가도 있다.[38] 고사카 마사노부는 "이 잔이야말로 다케다 가문을 멸할 잔"이라며 가쓰요리를 비판했다고 전해지지만,[38] 오다 노부나가는 우에스기 겐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쓰요리를 칭찬하여 속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가쓰요리는 신겐에게 멸문당한 스와 요리시게의 딸을 어머니로 두었기에, 가이 사람들은 그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여겼다.[38] 또한 가쓰요리가 정식 당주가 아닌 후견인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39]
신겐 시대와 달리 가쓰요리 시대에는 주변 정세가 급변했다. 오다가를 비롯한 강력한 세력들이 등장했고, 가쓰요리는 신겐의 중앙집권화 과제를 떠안아야 했다. 다케다 가문은 가이 영주들의 맹주로서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었고, 신겐 역시 영주들의 지지로 권력을 잡았다. 신겐은 시나노 영주들을 포섭하여 '이익집단' 체제를 구축했는데, 이는 다케다가 강할 때는 효과적이었지만 약해지면 결속력이 약화되는 한계가 있었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 다케다 가는 도카이도 방면에서 결전을 치를 능력을 상실했다. 가쓰요리는 조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철포를 중시했지만, 잦은 출병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이는 다케다가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가쓰요리는 센고쿠 다이묘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췄지만, 내부 사정과 불리한 주변 조건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가이, 시나노는 미노, 오와리, 간토 지방에 비해 불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인구와 경제력도 부족했다. 결국 다케다가 멸망 당시 도슈였던 가쓰요리는 망국의 장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고요군칸은 가쓰요리를 "항상 성급하지 않고, 소동을 일으키지 않으며, 자못 얌전해서 속이 깊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가쓰요리가 노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측근을 중용하여 내분을 야기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가쓰요리는 빈약한 지지 기반 때문에 친지나 노신들의 의견에 휘둘렸다고 볼 수 있다.
다케다 신겐의 용병술을 도입한 도쿠가와는 다케다가의 무위를 칭찬했지만, 멸망의 책임을 가쓰요리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역시 다케다가 멸망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숨기기 위해 가쓰요리를 평가절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에도 시대를 거치며 가쓰요리는 가문을 멸망시킨 어리석은 장수로 평가받았다. 근세 무가 사회에서는 가문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에는 야마지 아이잔과 도쿠토미 소호 등이 가쓰요리 재평가를 시도했다.
최근 연구자들은 가쓰요리에 대한 기존 평가가 노부나가, 이에야스, 신겐과의 비교에 치우쳐 진지한 검토가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5. 1. 긍정적 평가
다케다 가쓰요리는 도쿠가와 가문, 호조 가문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전술과 용맹함을 보여주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다케다 가문의 베테랑 무장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1569년 무사시노쿠니 다키야마 성 공격에서는 선봉에서 싸워 산노마루[37]를 함락시켰다.
- 같은 해 스루가노쿠니 간바라 성 공격에서는 교묘한 계략으로 호조 신자부로 형제 등 주요 무장을 죽이고 성을 함락시켰다.
- 같은 해 스루가 하나자와 성(현 모치후네 성) 공격에서는 나가사카 고켄, 스와 요리토요 등과 함께 빗발치는 화살과 총탄을 뚫고 성문에 매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1574년 미노 침공에서는 순식간에 아케치 성을 비롯한 18개의 작은 성을 함락시켰다.
- 1578년 호조 우지마사와 스루가에서 대치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후방을 공격당하자, 즉시 군을 돌려 도쿠가와 군을 오이강 서쪽으로 퇴각시켰다. 호조 군은 이러한 신속한 움직임에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 1580년 고즈케노쿠니 젠 성 공격에서는 갑옷도 입지 않고 성을 급습하여 '맨몸의 공격'이라는 전설을 남겼다.
이러한 군사적 업적을 바탕으로 고요군칸에서는 가쓰요리를 '너무 강한 대장'이라고 평가했다.
다케다 신겐조차 함락하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요새 다카텐진 성을 가쓰요리가 함락시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이러한 큰 성공은 가쓰요리의 자만심을 키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당시 센고쿠 다이묘에게 영토 확장은 가신들에게 나눠줄 영지를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세력 확장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고사카 마사노부는 가쓰요리가 선대의 유지를 따르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이 잔이야말로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킬 잔"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우에스기 겐신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다케다 시로는 신겐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책략에도 능하여 방심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
가쓰요리의 어머니는 신겐에게 멸문당한 스와 요리시게의 딸이었기 때문에, 당시 가이 사람들은 가쓰요리를 복수를 꿈꾸는 저주받은 아이라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아버지 신겐은 가쓰요리를 무용이 뛰어난 무장으로 인정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81년 준카이 북쪽 야마모토몬지와 서쪽 야마모토몬지의 분쟁에 대한 가쓰요리의 판결을 두고 가쓰요리는 중세인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새로운 정책을 펼쳐 다케다 영내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선례를 따르는 안정적인 법질서를 파괴하고, 다케다 가문의 당주인 가쓰요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사모토 쇼지는 「다케다 가쓰요리・부인・노부카쓰 초상화」(와카야마현 고야산・지묘인 소장)를 보고, 전쟁터를 지휘하는 무장의 모습보다는 지성이 넘치는 문인이라고 칭찬했으며, 히라야마 유는 “신푸성의 전략적 가치와 그 뛰어난 기능은, 아이러니하게도 숙적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덴쇼 임오의 난에서 증명한 것이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5. 2. 부정적 평가
다케다 가쓰요리는 다카텐진 성을 공략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남겼지만, 이로 인해 자만심이 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사카 마사노부는 가쓰요리의 승전 축하연에서 "이 잔이야 말로 다케다 가문을 멸할 잔"이라며 불평했다고 전해진다.[38] 그러나 우에스기 겐신에게 보낸 오다 노부나가의 편지에는 "다케다 시로는 신겐의 지시를 잘 지키고, 표리의 진퇴에도 교묘해서 방심할 수 없다"라고 적혀 있어, 이러한 평가는 속설과 맞지 않는다.가쓰요리는 스와 요리시게의 딸, 즉 신겐에게 멸문당한 가문의 후손이었기에 가이 사람들은 그를 복수를 꿈꾸는 저주받은 아이라고 우려했다.[38] 또한, 가쓰요리가 정식 당주가 아니라 다케다 요시노부(신겐의 장남)의 후견인이라는 '진다이(陣代)' 설도 있지만, 1차 사료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어 속설로 여겨진다.[39]
가쓰요리 시대에는 신겐 시대와 달리 주변 정세가 크게 변했다. 적대 세력이 많아지고, 다케다가와 비슷하거나 더 강한 세력들이 등장했으며, 특히 오다가는 매우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가쓰요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신겐이 남긴 중앙집권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케다 가문은 가이의 절대 군주가 아니라 영주들의 맹주로서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었다. 가쓰요리의 아버지 신겐도 영주들의 지지를 얻어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를 추방하고 가독을 이었다. 가쓰요리의 형 요시노부는 영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자결했다. 신겐은 시나노를 지배할 때 시나노 영주들을 포섭하여 다케다가와 이익을 공유하는 '이익집단' 체제를 만들었다. 이는 다케다가 강성할 때는 효과적이었지만, 약해지면 결속력이 약화되는 구조였다.
고요군칸에서는 집을 멸망시키는 장수의 유형을 "바보 같은 장수", "너무 영리한 장수", "겁 많은 장수", "너무 강한 장수"로 나누고, 가쓰요리를 "너무 강한 장수"의 예로 들었다. 다케다 가문의 유신들은 가문 멸망의 원인을 우에스기 가게카쓰와의 동맹으로 호조 우지마사와의 동맹이 파탄나고, 호조, 오다, 도쿠가와 동맹이 성립된 데에서 찾았다.[29]
오다 노부나가는 가독 상속 초기에는 가쓰요리를 가볍게 여겼으나, 동미노 침공 이후 그의 무용을 높이 평가했다. 나가시노 전투 이후에는 가쓰요리를 더 이상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고슈 정벌 때는 가쓰요리가 결전을 벌일 것을 경계했다. 노부나가는 가쓰요리의 목을 보고 "일본에 숨을 곳 없는 궁수라 해도, 운이 다하게 하여, 이렇게 되게 하는구나"라며 그의 불운을 언급했다.
가쓰요리 시대에는 영토 확장이 멈추고 영토 지배가 강화되면서 세금 징수가 엄격해졌다. 백성들은 부담이 늘지 않았음에도 불만을 가졌고, 이는 다케다 가문 멸망의 원인을 가쓰요리의 탓으로 돌리는 이유가 되었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영토 침공 직후 가쓰요리가 노부나가를 토벌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에치고에서 봉기한 잇코잇키를 진압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가쓰요리를 노부나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무장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27]
시바 쓰지로(柴辻俊六)는 가쓰요리를 "전국 시대 무장, 다이묘로서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전형적인 3대째(손주)"라고 혹평했고,[33] 스즈키 신야(鈴木眞哉)도 가쓰요리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전 후에도 계속 돌격하는 것을 보고 "가쓰요리는 懲りない(고리나이) 녀석이라고 해도 그만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34]
5. 3. 종합적 평가
대 도쿠가와씨, 대 호조씨와의 싸움 등에서 보여준 전술적 기민함과 용맹함으로 화려한 전과를 올렸으며, 맹장이 많은 다케다가의 고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고요군칸에서는 '너무 강한 대장'이라고 평하고 있다.[38]- 1569년 무사시 다키야마 성 공격에서는 총대장으로 있으면서 최전선에서 싸웠고, 산노마루[37]까지 공격해 함락했다.
- 같은 해 스루가 간바라 성 공격에서는 교묘하게 성의 병사를 꼬드겨 호조 신자부로 형제 등 이름있는 무장을 전사시키고 공략했다.
- 같은 해 스루가 하나자와 성(현 모치후네 성) 공격에서는 나가사카 고켄, 스와 요리토요 등과 함께 화살과 총탄이 빗발치는 상태에서 성문에 매달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1574년 미노를 침공하자 순식간에 아케치 성을 비롯해 부속된 작은 18성을 함락시킨다.
- 1578년 호조 우지마사와 스루가에서 대치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후방을 공격당하자, 정면에 있는 호조군을 뒤로 한 채 군을 도쿠가와 군 쪽으로 급진격했다. 이런 재빠른 움직임에 호조군은 추격을 엄두에 두지 못하고, 도쿠가와군은 다케다군의 기세에 눌려 오이강 서쪽으로 퇴각한다.
- 1580년 고즈게 젠 성 공격에서는 갑옷을 입지 않은 채 성을 급습했기 때문에 '맨몸의 공격'이라는 전설을 남겼다.
신겐조차 함락하지 못했던 다카텐진 성을 공략한 가쓰요리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큰 전과가 가쓰요리의 자만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해진다. 다만 당시 센고쿠 다이묘에게는 영토 확장, 즉 영주와 가신에 대한 은상 확보라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세력 확대를 계속해야만 하는 조직 구조상 문제도 있었다. 이 때문에 확대 노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중신 중에는 선대의 말을 지키지 않는 가쓰요리의 혈기를 탐탁지 않게 보는 자도 있었고, 전승 축연 자리에서 고사카 마사노부는 "이 잔이야말로 다케다 가문을 멸할 잔"이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오다 노부나가가 우에스기 겐신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다케다 시로는 신겐의 지시를 잘 지키고, 표리의 진퇴에도 교묘해서 방심할 수 없다"라고 쓰고 있어, 이 발언은 속설과 맞지 않는다.
어머니는 신겐이 멸문시킨 스와 요리시게의 딸이었기 때문에, 당시 가이 사람들은 가쓰요리를 복수를 바라는 저주받은 아이라고 우려했다.
가이 영주들부터 신겐이 키운 부장, 그리고 친지들과 가쓰요리의 측근 등으로 다케다가 가신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체제의 변동을 잘 꾸려가지 못한 다케다가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다.[38] 그런 이유로 도슈와 가신단(다케다 군단)이 우수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센고쿠 다이묘라고 언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겐의 치세는 카리스마라는 말로 표현되는 체제가 아니라, 지배하의 각 세력의 권력을 보장하고 각자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겐의 탁월한 능력의 반증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중앙집권화가 불가능한 결과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겐 시대와 가쓰요리 시대에는 주위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적대 세력이 많아졌고, 다케다의 자기 세력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국력을 가진 세력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그 중에서도 오다가는 특출나게 큰 세력이 되었다. 오다가와 항쟁하면서 신겐이 남긴 중앙집권화라는 성가신 일을 가쓰요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설에 가쓰요리는 다케다가의 정식 도슈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가독 상속(요시노부: 신겐의 장남)에 대한 후견인의 입장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소위 가쓰요리 진다이(陣代)[39]설이 있지만, 일차 자료로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속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번 스와가를 계승한 가쓰요리를 (그 전부터 있던) 동년배와 가신들이 깔보는 경향도 있었던 것 같다.
다케다씨 자체가 가이의 절대 군주가 아니라, 자국 내 영주들의 맹주로서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 사실 가쓰요리의 아버지 신겐도 영주들의 지지를 모아 아버지 노부토라를 추방하고 나서 가독을 승계했다. 또 가쓰요리의 큰형 요시노부는 영주들의 지지를 모으지 못해 폐적되어 자결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신겐이 시나노를 지배하에 둘 때에도 시나노국 영주들을 적극적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다케다가와 이익을 공유한 이익집단 같은 체제를 띠게 된다. 다케다가의 위세가 좋을 때는 견고하게 결속되지만, 일단 틈이 보이기 시작하면 공유하는 이익이 없어지게 되고 살얼음판을 건너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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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묘의 명령을 출납하고 외부인접대를 담당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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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비어있을 때 대리로 성을 관리하는 사람, 루스이가시라(留守居頭), 오루스이(大留守居)등의 별칭도 있다. 전국시대에 다이묘 직할 성의 관리, 정무, 방위 등을 담당했던 가신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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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군 vs 로마군: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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